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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마당] 경쟁심리

오전에 함께 테니스를 했던 한 친구가 오후에 병원 입원 수술을 받는다고 한다. 과거 위암 수술을 했는데 심장에 물이 찾는지 재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술 잘 끝내고 빠른 시일 내에 코트로 복귀하기를 회원 모두가 진심으로 두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     지난달 월례대회에서 우승도 했던 그는 평소에는 친구지만 경기장에서는 치열한 경쟁자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가 경쟁자다. 그러다 보니 승리를 위해 은근히 상대가 실수하고 잘못되기를 바란다. 친구들과 골프를 치면서 종종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 이란 농담을 하는데 은연중에 이런 인간의 심리가 묻어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겉으로는 선의의 경쟁이라고 늘 말하지만 속으로는 상대가 잘못되기를, 망하기를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거꾸러지기를 바라는 정말 못된 심보도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살다가 보면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시기와 질투, 그리고 경쟁심이 있어서 상대가 잘되면 배 아파하고 상대가 실패하면 속으로 웃는 경우가 있다. 정말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의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이 부처님이 아니니 매사 대자대비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이중적 감정은 나이가 들다 보니 가끔 들려오는 동창의 사망 소식을 접할 때도 슬쩍슬쩍 나타난다. 유족에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속으로는 “아직 살아있는 내가 승자네” 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도 사실이다.     왜 인간은 모든 사람을 사랑만으로 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먹이를 놓고 먼저 먹으려고 서로 싸우는 생존경쟁의 본능을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가 부처님이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김영훈독자 마당 경쟁심리 친구 사이 사망 소식 병원 입원

2022-12-04

[우리말 바루기] ‘막역한 친구’는 어떤 친구?

‘막역한 친구’와 관련해 옳은 것은?   ㉠ ‘막연한 친구’를 잘못 쓴 것   ㉡  막가는 친구 사이   ㉢  허물없이 아주 친한 친구   ‘심심한 사과’ 표현을 두고 문해력 논란이 있었다. 일부 네티즌이 ‘심심한’을 ‘지루한’으로 잘못 해석함으로써 벌어진 일이다.   혹여나 ‘막역한 친구’도 비슷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싶어 문제로 만들어 봤다.   어떤 이를 소개할 때 “그와 나는 막역한 친구”라고 한다면 ‘막역한 친구’가 어떤 사이인지 곧바로 와닿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처럼 ‘막연한 친구’를 잘못 썼나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막연하다’는 뚜렷하지 못하고 어렴풋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막연한 친구’는 거리가 먼 친구로 그런대로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다.   좀 억지스럽지만 ㉡처럼 막가는 친구 사이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막’자에 집착하다 보면 혹시나 어떤 계기로 사이가 틀어져 서로 막 나가는 친구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정답은 ㉢이다. ‘막역한 친구’는 허물없이 아주 친한 친구를 뜻한다. ‘막역(莫逆)하다’는 허물없이 아주 친하다는 의미를 가진 한자어다. ‘막역한 관계’ ‘막역한 사이’ 등처럼 사용된다.   일부에서는 젊은 층의 문해력을 탓하기도 하나 이들이 문자보다는 영상과 이미지에 익숙한 세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려운 한자어에 약하다는 것은 일면 이해 가는 부분이 있다. 평소 잘 보지 못하는 단어가 나올 때는 사전부터 찾아보는 버릇을 들이면 어휘력 부족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우리말 바루기 친구 막역 친구 사이 일부 네티즌 어휘력 부족

2022-09-18

[삶의 뜨락에서] 흐르는 시간 위에서

시간은 같이 가는 사람에 맞추어 속도를 바꾸어 흐른다. 옛날 사람들과는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자적 동행하는 발걸음이었다. 세상이 분주해지기 시작하자 쏜 화살처럼 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빨리 빨리라는 속도에 매달리면서 같이 가기 거의 불가능하게 총알처럼 날아가며 헐떡대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시간이 빛보다 빠르게 스치고 가버린다. 그래서 시간을 향하여 눈치 없다, 무정하다, 속절없다, 너 가는 줄 몰랐다 하며 불평하지만 실상 시간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똑같은 발걸음으로 동행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지경에 들면 빨리 지나가기 바라고 즐거우면 천천히 가기를 바라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시간아 멈추어라” 외치기도 한다.     시간 속에 담는 것이 많아지면 좋은지 적은 경우가 좋은지 생각하게 된다. 어느 시절에는 몇백년 세월이 지나가도 바뀌는 것 별로 없이 거의 똑같은 것을  담아 그다지 많지 않은 종류의 세상사가 거기에 있어 조상님 가르침이나 부모님 가르침이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노인의 지혜가 큰 값을 가지고 있었다. 자꾸 사람들의 욕심이 커지면서 백 년 시간에 품던 것을 십년 시간 속에 욱여넣게 되어 조상님들의 지혜가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부모님들의 지식조차 별로 쓸데가 없도록 그렇게 빠르게 지식이 변하고 엄청난 양의 지식이 쌓여가면서 드디어는 아침저녁으로 그 효능이 달라지고 있다. 도리 없이 시간 속을, 시간 위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 변화에 당황하고 있는 모양이 지금 우리 삶의 현장이 아닌가 하며 바라보게 되었다.     몇 시 부근에 만나자 약속하고 먼저 온 사람이 한 시간 넘게 기다리던 풍경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지금은 1분만 늦게 나타나도 즉시 위치 확인하고 어긋나면 몇분도 기다리지 않는다. 이전에 5분과 지금의 5분은 그 무게가 다르다. 지금 5분은 바쁘게 엷어지는 인내심으로 길어지고 그러나 짧아졌다. 5분을 천천히 느끼던 시절에는 5분이 다섯 시간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지금의 5분은 딱 5분일 뿐이다. 다섯 시간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5분은 그렇게 다른 값으로 환산되어 사물을 바라본다. 시간은 늘 같은 속도인데 5분을 넘어 기다리던 자와 5분을 기다리지 못하는 자가 있어 세상은 또 다른 풍경으로 읽힌다.   365일의 시간이 새해맞이 사람들에게 허락되었다. 흘러가는 시간 위에서 꿈꾸듯 사는 인생들이 오는 시간 가는 시간을 그려내고 있다. 일 년을 보내고 문득 눈을 뜨면 지나간 시간이 활동사진처럼 소리 없이 펼쳐지며 내일 속으로 멀어져 간다. 다가오는 시간을 보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이 마침표를 기다리며 다가오고 있다. 지난 5분과 앞에 5분이 다른 크기로 팔짱을 잡는데 어떻게 보조를 맞추어야 할지 똑똑한 대답이 궁해지는 2000년대의 시간 위에서 여기저기 살펴보는 우리의 모습이 낯설다.   유유히 흘러가며 동행하던 친구가 이제는 자꾸 재촉하는 녀석으로 바뀌었지만 두 친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속도를 던져버리고 어느 자리가 빛나는 시간인가 지혜로 생각해야 할 때인 듯하다. 재촉하는 세월에 휩쓸리다 보면 어느 날 자리 잃고 공허하게 서 있는 모습이 될 것 같다. 빛나던 때를 기억하고 빛나는 때를 만들어가는 사람의 발걸음이 시간 위에서 아름답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시간 양의 지식 부모님 가르침 친구 사이

2022-01-24

[한 週 漢字] 愛(애)-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광복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노래 제목에 제일 많이 등장한 단어는 ‘사랑’이며, 가사에 ‘사랑’이 포함된 노래가 전체 가요의 65%에 달한다고 한다. 아마 노래의 주제까지도 감안하면 그 비율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사랑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이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이나 정의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으며, 대상과 범위를 어떻게 한정 지을지에 따라 사랑은 무한히 변주된다. 기독교의 성경에서 예수는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묻는데, 이 대목의 그리스어에는 각각 ‘아가페’가 두 번, ‘필리아’가 한 번 사용됐다고 한다.   아가페는 조건 없이 이타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의미하고 필리아는 형제애적인 친구 간의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그리스어에는 남녀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라는 단어도 있다.   불교에서 사랑은 ‘자비(慈悲)’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慈)’는 즐거움을 주고 그 즐거움을 같이 즐거워 마음이고, ‘비(悲)’는 고통을 덜어 주고 괴로움을 같이 괴로워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다른 이를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연민이 사랑을 일으키고 그 사랑이 실천으로 옮겨질 때 자비가 이뤄지는 것이다.   『맹자』에서는 “군자는 만물을 아끼기는 하지만 인자하게 대하지는 않고, 사람에게는 인자하게 해 주지만 친밀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어버이에게 친밀하게 대하고 나서 사람들에게 인자하게 대하며, 사람들에게 인자하게 하고 나서 만물을 아낀다(君子之於物也 愛之而弗仁 於民也 仁之而弗親 親親而仁民 仁民而愛物)”라고 하여, 사랑을 베푸는 데 실천의 단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아끼다(愛), 인자하다(仁), 친밀하다(親)’는 동사로 다양한 사랑을 나타낸다.   사랑은 남에 대해 가지는 진실한 마음, 뜨거운 가슴에서 시작된다는 뜻일 터이다.     친구 사이에 나누는 사랑을 더 강조하는 시대라고 해석하면 지나칠 수 있겠지만, 역시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규동/ 경성대 한국한자연구소 교수한 週 漢字 사랑 제자 베드로 친구 사이 우리나라 대중음악

202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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